0.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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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E 대학생 자작자동차대회 E-Formula 전기시스템 제작기

2022년 03월 28일

들어가며

전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여름, 1학년 때부터 알고 지내던 기계공학과 친구가 연락을 해 왔다.

갓 전역해 세상만사가 재밌던 나는 덥썩 물어버렸고,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기시스템 파트장을 맡고 있었다.

전기자동차에서 전기시스템이라.. 대충 생각해봐도 할 일이 굉장히 많다. 고전압과 저전압 시스템에 구성에 대한 큰 그림부터 자잘한 회로 설계까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모든 내용과 시스템 전반을 새 팀원이 합류할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기에도 어려움이 있고, 적어 놓으면 나중에 누군가 유용하게 써먹지 않을까 싶어서 정리해 둔다. 우리 팀은 이번에 처음으로 전기차를 시도하는 반면 국내 다른 대학교들은 이미 수 차례 E-Formula 출전 경험이 있다. 분명 우리보다 더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쌓은 많은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혹여 이 글이 다른 팀에도 도움이 된다면 좋을 것이고, 글에서 오류나 개선점을 발견한다면 얼마든지 고쳐 주시기를 바란다.

앞으로 작성할 글에서 설명하는 개념이나 회로는 절대 정답이 아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 회로를 설계하고 뒤늦게 문제를 알았지만, 수정하기 어렵고 귀찮아 그냥 사용한 것들이 많다. 또한 여전히 많은 것들에 무지하다. 대회가 다 끝나고 이 글을 쓰면서야 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결국 규정이 전부다. 규정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 규정도 맘에 안 드는 것들이 많다.

의외로 글을 보고 연락하시는 분들이나 대회장에서 알아보시는 분들이 계셔 다소 놀랍다. 아는 수준에서 최대한 답변해 드리고 있으니 궁금한 것이 있다면 편하게 연락해 물어보셔도 좋다. 다만 보내드린 답장을 잘 받아 보셨다면 확인했다고 꼭 다시 연락을 주시기 바란다. 최근에 개인 메일 주소인 mail@luftaquila.io 로 발송한 메일들이 스팸 처리되는 문제가 있어 그렇다.

돌아보며

우리 팀은 2021년 여름에 처음 전기차를 시작해 22년, 23년 KSAE E-Formula A Class 대회에 출전했다. 돌아보니 꼬박 만 2년이다.

22년 첫 대회에서는 검차를 통과하지 못했다. 대회 전날까지 2주간 열몇명이 날밤을 새면서 작업했지만 결국 대회날까지 차를 굴려보지도, 차단 회로 작동을 검증하지 못했다. 미완성인 차가 탈락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대회장 숙소에서도 날밤을 새며 배터리 검차를 겨우 통과시켰지만, 결국 전기시스템 검차에서 탈락했다.


대회 첫째 날 이러고 배터리 머리맡에서 잤다.

그래도 우리도 TSAL에 빨간 불 켜 봤는데. 대회장에서 다른 팀들이 HV 올리고 쌩쌩 달리는거 구경만 하다 오니 솔직히 좀 열받았다. 1년 더 하기로 했다. 대회가 끝나고도 한참 지난 22년 11월 말에서야 차를 주행 가능한 상태로 만들고 첫 테스트 주행을 했다.

삽질해본 경험들을 바탕으로 2년차에는 많은 개선을 이루었으나 여전히 수많은 문제에 얻어맞았다. 작년에 되던 것도 안 됐다. 대회 직전까지 일정에 쫓기며 작업을 했고 모든 것이 불확실해 어느 것 하나 안심할 수가 없었다.


다같이 정말 고생했다.

차량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지 못한데도 운이 따라 모든 검차를 통과하고 내구레이스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검차 통과하고 이벤트에 출전만 할 수 있으면 만족한다고 얘기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수상도 하게 되었다. 2년간 쏟아부은 노력의 마지막 결과가 좋아 기쁘다.


이게 되네...

전기차를 시작한 이후로 도로에 파란색 번호판 차들만 보면 저게 어떻게 멀쩡히 굴러가지… 싶다. 앞으로 도전하는 모든 팀들의 건투를 빈다.

소개

E-Formula는 우리가 가지고 놀던 RC카가 아니다. 진짜 사람을 태우고 굴러가는 진짜 자동차다. 풀스케일 자동차를 모터로 밀어주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우리 팀이 사용하는 모터는 정격 전력이 68kW이다. 대형 건물에 흔히 있는 15인승 1,000kg 엘리베이터의 모터가 11kW정도 된다. 모터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배터리는 최대 전압 294V에 연속 방전 전류가 245A이다. 전력만 놓고 보면 가정용 선풍기 1800대를 동시에 강풍으로 돌릴 수 있는 수준이다.

한편 사람이 타면 제일 중요한 것은 항상 안전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구경조차 못 할 고전압 고전류 배터리와 50mA만 흘러도 멈추는 심장을 가진 인간을, 전기가 아주 잘 통하는 철제 프레임 안에 같이 집어넣고 굴러가게 해야 한다.

전기 안전

소개만 대충 읽어봐도 감전당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

감전은 인체를 도선으로 전류가 흐르는 것을 말한다. 감전되었을 때 인체가 받는 피해는 직류/교류, 접촉 시간과 면적, 주파수(교류), 상/하향(직류), 인체 저항 등 많은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감전과 관련된 정보는 한국산업표준 KS C IEC TS 60479-1 인체와 가축에 대한 전류의 영향KS C IEC 60364-4-41 감전에 대한 보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안전규정은 교류 감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스템은 모두 직류(배터리)이므로 여기서는 직류에 대해서만 알아보자. 1초 동안 손에서 발로 흐르는 전류에 의한 감전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다음과 같다. 보다 상세한 정보는 위 산업안전표준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류설명전류비고
감지한계전류의 흐름을 느끼기 시작함> 2mA-
이탈한계근육 마비로 탈출 불가능70~300mA회복 가능한 기능장애
심실세동한계심실세동 확률의 유의미한 증가> 300mA감전 시간이 짧을수록 유리


심장 박동이 전류에 의해 교란당하는 심실세동은 심장주기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심장은 한 번 박동하는데 걸리는 약 800ms보다 짧은 시간동안 감전을 당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버틴다. 200ms 미만의 감전에서는 심장주기 중 취약기일 때만 심실세동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감전이 심장주기보다 길어지면 심실세동 확률이 급격히 증가한다. 500mA에 1초동안 노출되면 심실세동 확률이 50%까지 올라간다. 감전 시간이 2초보다 길어지면 300mA도 위험하다. 그래도 이 값은 교류에서의 50mA보다 높은 편이다.

그러나 이 값은 전류가 인체에서 흐르는 경로에 따라서 크게 달라진다. 이를 심장전류계수라고 하며, 다음 표를 따른다.

경로심장전류계수
왼손에서 왼발, 오른발 또는 양발1.0
오른손에서 왼발, 오른발 또는 양발0.8
양손에서 양발1.0
왼손에서 오른손0.4
왼발에서 오른발0.04
가슴에서 왼손1.5


손에서 발로 흐르는 120mA의 전류는 손에서 손으로 흐르는 300mA의 전류와 동일한 심실세동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냥 100mA 이상은 무조건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속 편하다.

이렇듯 전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한편, 전압은 전류가 인체를 뚫고 흐를 수 있게 만든다. 전압이 낮다면 전류는 인체를 통해 흐를 수 없다. 이 안전 한계를 허용접촉전압이라고 하며, 직류에서는 120V로 규정된다.(KS C IEC 60449 건축 전기 설비의 전압 밴드)

옴의 법칙을 기억하는가? V=IR에서 V와 I가 어느 정도까지 위험한지 알아보았다. 이를 결정하는 마지막 요소, 인체의 저항 R은 피부의 젖은 정도와 접촉 면적 등에 따라 광범위하게 달라진다. 대체로 인체 저항은 1~10kΩ 정도로 본다.

안전에 있어서, 보수적으로 계산값을 산출하는 것은 아무리 과해도 부족하지 않다.

한 줄 요약: 직류 100V 100mA 이상은 목숨이 위험하다.

HV와 LV

전기자동차의 전기시스템은 모터(엔진)을 위한 구동계통과 나머지 전자장치등을 위한 저전압 계통으로 나뉜다. 보통 구동계통HV라고 부르며, 고전력 전달을 위해 150V 이상의 고전압을 사용한다. 우리 차량은 최대 294V를 사용한다. 저전압 계통은 차량의 제어와 편의 기능 등에 사용되며 차체에 접지된 12V를 사용하고 LV 또는 GLV라 부른다. 한편, 한국자동차공학회는 KSAE 대학생 자작자동차대회 Formula 차량기술규정에서 HV를 60VDC 또는 25VAC 이상의 전기계통으로 규정하고 있다.(제10장 전기시스템 제44조의 2항 1호)
윗 문단을 잘 읽어보았는가? HV 계통은 굉장히 위험하다.

접지와 절연

접지(그라운드, GND)라는 것은 한 회로 시스템의 전압 기준점을 정하는 것이다. 어떤 기준점(0V)이 있어야 그 기준점과의 상대적인 전위차, 즉 전압을 잴 수 있다. LV 시스템의 전압 기준점은 12V 배터리의 -단자이다. 접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실제로 접지선을 땅에 묻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누설전류와 노이즈를 안전하게 처리한다. 한편, 자동차는 대지 접지가 불가능하므로 LV 배터리의 음극을 차체와 접지하여 사용한다. 이는 상용 차량에서도 동일하다.

전기가 통하려면 닫힌 회로가 구성되어야 한다. 서로 연결되지 않은(절연된) 두 전원은 닫힌 회로를 구성할 수 없다. 따라서, 300V의 한 극과 12V의 한 극을 양 손으로 잡더라도 감전되지 않는다(그래도 실제로 해볼 일은 없길 바란다).

그러나 만약 HV와 LV가 서로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이 상태에서 LV와 HV를 한 극씩 각각 잡는다면 당신을 부하 저항으로 하는 닫힌 회로가 형성될 수 있다. 차량기술규정 44조 3항 3호 “60V 이하의 전압을 가지더라도 구동시스템과 전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구동시스템에 포함된다.” 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만약 LV와 HV가 절연되어 있지 않다면, LV의 음극이 차체에 접지되어 있기 때문에 차체에 닿은 채로 HV의 한 극에만 접촉해도 감전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합선

합선, 단락, 쇼트는 모두 같은 용어이다. 두 접점이 전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 수위가 다른 두 수조 사이의 수문을 개방하면 물은 두 수조의 수위를 똑같이 맞추기 위해 이동한다. 마찬가지로, 전압이 다른 두 접점을 전선으로 연결하면 두 접점의 전압이 같아질 때까지 전류가 흐른다. 이 때 흐르는 전류는 두 점 사이의 전압차를 V, 접점을 연결한 전선의 저항을 R 로 하는 V = IR 을 철저하게 따른다.

우리가 차량 배선에 흔히 사용하는 22AWG 구리 전선의 저항은 미터당 0.053옴이다. 294V 전원의 +, -극을 1m짜리 22AWG 전선으로 합선시키면 5550A가 전선에 흐른다. 이 때 전력 P = VI 이므로, 1630kW의 전력이 열로 소모된다.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수치다. 실제로는 셀이 이 정도 수준의 전류를 공급할 수 없어 전력은 이보다 낮고, 셀에 영구적인 손상이 간다. 당연히 전선은 짧은 시간 동안 폭발적으로 발생하는 발열을 견디지 못해 폭발한다.

팀 내에서 매년 이러한 HV 합선 사고가 한두 차례 발생한다. 작업 중 부주의로 인해 스패너 등 공구를 전류 경로로 합선되거나, 피로로 인해 손상된 전선에서 도체가 노출되어 합선이 일어난다.


세그먼트 1개, 50V 합선으로 인한 폭발

항상 세그먼트는 합선의 소지가 없도록 철저히 절연하고 꺾여서 손상된 전선이 있는지, 공구를 쓰다 합선될 가능성이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합선이 일어나면 세그먼트가 영구 손상을 입는 것도 문제지만, 순간적인 발열로 작업자가 화상 등 피해를 입는다. 우리가 다루는 HV는 정말 위험한 물건이다.

푸념

그렇지 않아도 진동, 충격, 불안정한 전압 등으로 전자부품에는 가혹 환경으로 꼽히는 자동차에, 탑승자의 안전을 위한 온갖 장치와 부품들, 일반적인 전자회로에선 구경도 못할 고전압 고전류로부터 회로를 보호하기 위한 설계 등 고려해야 할 것들이 정말 너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무 많다.

이런 실무 회로 설계는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정말 알음알음 공부하고 느낌으로 때려 맞추며 설계해야 했다.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려 사항들이 너무나 많았다. 이러한 내용들까지 최대한 하나하나 짚으면서 어떻게 회로 설계를 했는지, 무엇을 고려했는지 기록하고자 한다.

먼저 HV와 LV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존재 이유를 전체적으로 알아본 다음, 각 요소 하나하나에 대한 내용을 다루려고 한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목차


회로도

우리 차량의 모든 전기계통 회로도는 KiCAD로 설계하였으며, Github에 공개되어 있다.